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내가 쓰는 에세이, 누군가의 일기장일지도 (서사, 몰입, 문장)

by 나든(NARDEN) 2025. 9. 5.

책장앞 쇼파에서 책읽는 사람

에세이는 흔히 짧은 단상이나 감정을 기록하는 장르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잘 쓰인 에세이는 하나의 서사로 완성되며,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에세이를 읽는다는 건 누군가의 일기장을 엿보는 일 같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단순히 솔직해서가 아니라, ‘서사의 기술’이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2025년 한국 에세이에서 볼 수 있는 서사적 구성, 문장력, 독자의 몰입 포인트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잘 읽히는 에세이에는 흐름이 있다

에세이를 단지 ‘감정의 나열’로 여긴다면 오해입니다. 요즘 독자들이 열광하는 에세이에는 모두 일관된 흐름이 존재합니다. 김혼비의 『아무튼, 술』은 술을 소재로 하지만 단순한 음주 기록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 어른이 되어 겪는 사회생활, 인간관계에서의 어긋남 등을 ‘술’이라는 키워드 아래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냅니다. 덕분에 독자는 챕터가 끝나도 그 이야기의 줄기를 따라가게 되고, 감정과 인식의 변화에도 함께 몰입하게 됩니다.

비슷하게 최은영의 『내게 무해한 사람』은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를 넘나들며, 관계 속에서 겪는 상처와 회복의 과정을 단단한 문장으로 담아냅니다. 특히 글이 짧다고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글마다 감정의 시작과 끝이 명확하고, 그 안에서 독자가 ‘감정의 여정’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이끄는 힘이 강한 에세이는 독자에게도 ‘머무르게 하는 힘’을 줍니다.

요즘의 에세이는 스토리텔링에 대한 감각이 매우 섬세합니다. 일상의 조각들을 단순히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이나 감정의 고저를 설계해 독자를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독자는 마치 소설을 읽는 듯한 집중력을 갖게 되고, 이 과정에서 작가의 삶이 ‘나의 일기장’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일상의 이야기지만, 공감은 설계된다

서사 중심 에세이에서 중요한 건 ‘몰입’입니다. 그런데 몰입은 단순히 재밌거나 자극적인 소재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작가가 자신을 어떻게 내보이고, 어떤 방식으로 독자와 감정을 공유하는지를 설계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슬아의 『일간 이슬아』는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겉보기에 단순한 일상 보고처럼 보이지만, 글 속에는 타이밍, 반복, 대화체, 감정의 축적이 치밀하게 짜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하루치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독자의 기억에 차곡차곡 남게 됩니다.

또한 김신회의 『보통의 언어들』은 감정 표현을 최소화하면서도 강한 공감을 이끌어냅니다. 지나친 감정의 묘사 없이도, 독자에게 ‘나도 저랬지’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습니다. 이는 작가가 감정을 의도적으로 조절하고, 핵심이 되는 문장을 어디에 배치할지를 전략적으로 고민했기 때문입니다.

글이 길지 않아도,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설계의 힘입니다. 몰입은 우연히 생기지 않고, 정서와 리듬, 단어의 밀도를 조율한 결과입니다. 따라서 서사적 에세이를 쓰고 싶다면 ‘무엇을 말할까’보다 ‘어떻게 들리게 할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감정은 공감으로 연결되어야 하고, 공감은 의식된 흐름 속에서 더 강해집니다.

문장력은 리듬과 밀도에서 나온다

에세이에서 문장은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문장의 길이, 리듬, 어휘 선택은 독자의 감정 상태를 조율하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정세랑 작가의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는 산문이면서도 마치 시처럼 읽히는 문장이 많습니다. ‘딱 맞는 말’보다는 ‘딱 느껴지는 말’을 쓰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은 논리적이기보다는 정서적으로 완성되어 있으며, 문장의 끝에서 독자는 의미가 아니라 감정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황정은 작가의 『디디의 우산』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장의 호흡, 단어의 간격, 그리고 반복되는 어조는 독자에게 정서적 리듬감을 제공합니다. 글의 분위기에 따라 문장을 빠르게 달리기도 하고, 조용히 멈추기도 하는 방식은 음악적 감각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요즘의 에세이는 문장의 구조보다는 ‘느낌’을 중시하며, 문장 하나로도 독자의 마음을 흔드는 힘을 추구합니다.

글쓰기에서 중요한 건 ‘정확성’만이 아닙니다. 문장은 감정의 온도를 옮기는 도구이자, 정서적 친밀감을 형성하는 연결고리입니다. 그래서 잘 쓴 에세이는 문장이 짧아도 깊고, 간결해도 풍부합니다. 결국 문장력은 ‘글을 잘 쓰는 능력’이라기보다, ‘감정을 세밀하게 전달하는 감각’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25년의 한국 에세이는 일기처럼 시작하지만, 그 끝은 독자의 감정 속에 자리잡습니다. 단순히 자기표현을 넘어, 감정과 기억을 공유하는 서사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쓰인 에세이는 혼잣말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속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쓰는 문장 하나, 감정 하나가 다른 사람의 일기장에 스며들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요즘 시대의 에세이가 가진 놀라운 힘입니다.

반응형